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
오늘 우연히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명언 하나를 읽게 되었다. 어릴 적 TV 애니메이션으로 『톰 소여의 모험』을 보며 처음 들었던 이름, 마크 트웨인. 그때는 밝고 경쾌한 모험의 아이콘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의 또 다른 작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내게 더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풍자작가이자, 인간 내면의 진실과 사회의 위선을 날카롭게 들여다본 문학적 사상가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
"If you tell the truth, you don't have to remember anything."
처음엔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 정말 멋진 문장이다. 위선 없이, 꺼리낌 없이,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은 기억을 되짚지 않아도 되는 법이니까.
진실은 기억 창고 속 깊은 곳에 박혀 있는 게 아니라, 내 존재 전체에 각인되어 있는 감각에 가깝다. 그래서 굳이 기억이라는 작동을 하지 않아도, 그냥 튀어나오듯 입 밖에 나올 수 있는 게 진실의 힘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곱씹고 다시 생각해보니, 오랜 세월 법정 안팎에서 살아온 법조인의 입장에서는… 이 명언이 오히려 위험한 감각을 심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혹여 어떤 경험이 부족한 법조인이 이 멋진 문장을 재판에서도 늘 통하는 원칙이라 착각한다면, 그건 치명적인 오류일 수 있다.
진실(truth)과 사실(fact)은 다른 언어다
현실의 법정은 진실(truth)을 말하는 곳이 아니라, 사실(fact)을 말하는 곳이다.
재판은 사실을 찾아, 그에 인간이 만든 근거(법률)를 적용해 사회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결론을 내림으로써 분쟁을 정리하는 시스템에 불과하다.
그 시스템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불완전하며, 보편적 진실, 정의롭다는 보장도 없다.
마크 트웨인이 언급한 진실은 철학적 가치판단의 영역에 더 가깝다. 진실은 곧 '정의로운 것' 또는 '옳다고 믿는 것'일 수 있다. 반면, 재판에서의 말(statement)은 '입증 가능한 사실', 즉 팩트를 근거로 삼는다.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고 객관적 기억으로 드러나지만, 진실은 평가되는 것이고 주관적으로 판단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두 단어는 같은 듯 전혀 다르다.
진실만으론 부족한 법정
많은 이들이 "나는 진실을 말했다"는 믿음만으로 법정에서 안심한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말이 아무리 정직한 동기나 올바름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분명하지 않은 기억에도 신념으로 말을 이어간다면, 오히려 위증이고 사실에 기반한 재판 시스템에선 불리하다.
더 무서운 건,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해석과 평가를 덧붙여 사실을 재구성하는 경우다. 본인 가치에 맞는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고,
왜곡된 사실에 기반한 판단은 언제든 비참한 결과로 흘러갈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의 '진실'에 가까운 결과일지라도, 그 과정이 틀어졌다면 법적 정의도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의 명언은 일상에서는 영감을 주지만, 법정이라는 현실은 그 명언을 감당하지 못한다.
법정에서 다루는 진실은, '양심의 진동'이 아니라, '증거와 일관성 위에 구조화된 말'이다.
대통령 탄핵심판등 지금 진행 중인 몇몇 정치적 재판들을 보면, 이 위험성은 더욱 도드라진다.
피고인과 변호인 모두가 법조인임에도 불구하고, 증거와 정합성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진실만을 반복해 강조할 뿐이다(사실 엘리트 법조인인 그들은 안다. 본인이 사실을 말하는 것도 진실을 말하는 것도 아님을).
그 결과는 무엇인가.
팩트가 증발한 법정, 신념(지나치면 '망상'이다)만이 떠도는 정치적 선동의 연설장이 되어버렸다.
진실을 말(statement)하기 전에
마크 트웨인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문학적 언어로, 진심 있는 삶의 태도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법정은 삶이 아니라, 구조화된 제도다. 진심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직함만으로는 위험하다.
법정에서 말이 갖는 무게는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맥락 속에서 입증 가능한 구조로서의 말(statement)이어야 한다.
삶에서 진실을 실현하는 것과, 법정에서 진실을 말로 증명하는 것은 다르다.
재판은 품던 진실을 표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기억으로 도출된 사실에 기초해 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것을 말하는 건 쉬워도, 그 믿음을 타인의 말로 바꾸는 건 어렵다.
그때 필요한 것이 사실이고 논리다.
언제부턴가 나는 가끔 진실(truth)을 말(statement)하고 싶을 때, 그 진실이 어떤 구조 위에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 구조와 맥락에 맞추어 증거와 사실(fact)을 먼저 점검한다. 나는 오늘도 말하기 전에 한 번 쉰다. 요즘엔 그게 나만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어떨 땐 참 우습다.